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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우리도 자부심 느낄 이민사 있다

한인 초기 이민자의 묘소를 취재하러 지난달 하와이를 다녀왔다. 단지 한인 이민 120주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역사의 흔적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실제 그곳에서 본 이민사의 흔적은 세월에 의해 닳고 닳아 희미해지고 있었다. 한인 선조들의 묘비는 부서지거나 방치된 채 잡초와 수풀 속에 가려져 있다.   한인 이민사는 오늘날 완전히 양상이 변했다. 102명으로 시작됐던 한인 이민 역사는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숫자적으로만 봐도 200만 명을 넘어섰다. 곳곳에 한인 사회가 형성돼 있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한인도 많다. 어디를 가나 한국 제품, 음식, 콘텐트 등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이민 생활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으로 풍족해졌다. 단, 이민 역사의 뿌리를 알고 보존하려는 의식이 부족한 건 아쉬움이다.   하와이에 앞서 중국계 이민자들의 지워질 뻔한 묫자리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갔었다. 〈본지 10월30일자 A-1·3면〉 당시 취재 중 만난 중국계 대부분은 이민 3세, 혹은 4세들이었다. 겉모습만 아시안일 뿐이지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완전히 미국화된 이들이다.   그들에게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중국어를 잃은 지는 오래됐지만, 뿌리(정체성)와 이민 선조의 역사를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였다. 오리건 주는 중국계 이민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땅이다. 그들은 그 땅에서 철도를 부설하고 도로와 강둑을 건설했다. 중국계 후손들은 이민 선조들의 노동력, 전문성, 추진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리건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이 곧 이민 역사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다.   그 때문에 중국계 커뮤니티는 콘도 단지로 개발될 뻔했던 선조들의 묘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 커뮤니티처럼 체계적인 뿌리 교육을 받아 이미 미국화된 후손이라 해도 ‘차이니스-아메리칸’이라는 정체성에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모두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인 사회는 어떤가. 우리에게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민 역사가 있다. 1900년대 초였다. 오늘날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게 열악한 시기였다. 당시 유교문화권에서는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난다는 건 뿌리를 들추어내는 일로 생각했다. 그 뿌리를 이역만리 땅에 옮겨 심으려고 종일 땡볕에서 고된 농장 노동을 감내했던 이들이 한인 초기 이민자들이다.    당시 사회적 하층민들이 농장 노동자로 온 것 같지만, 행적을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선각자였다. 당시 노동자 월급은 약 16달러에 불과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그때 돈으로 무려 2000달러를 마련했다. 그들은 당시 300명 이상의 한 달 치 봉급과 맞먹는 액수를 모아 학교부터 세웠다. 또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2/3를 조달했다.   한인 초기 이민자들은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미국 사회 발전에 기여하려 노력했다. 훗날 그들의 자녀는 미군으로도 복무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에 기여했다.         한인 이민 역사가 한 세기를 지났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차세대는 한국어를 잃어가고 있다. 언어뿐 아니라 뿌리 의식을 심어주려는 노력 역시 약화하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 기사를 한글판뿐 아니라 영문판으로도 제작했던 이유다.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기사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인 2세 자녀를 둔 부모라면 본지의 아시안 역사 기획 시리즈 기사를 자녀들과 꼭 공유했으면 한다. 이민 역사, 이민자의 미국 사회 발전에 대한 기여, 한인의 정체성 등에 대한 내용이 2세들의 뿌리 찾기 과정에 첫 단추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뿌리를 안다는 것, 곧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의 자부심이다. 장열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자부심 이민사 한인 이민사 이민 선조들 한인 사회

2024-01-15

[취재 수첩] 묘비에 남겨진 '위대한' 유산

  120년 전엔 뱃길만 있었다.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한 배가 호놀룰루항 7번 선착장에 도착(1903년 1월 13일)한 건 무려 21일 만이었다.   일곱살 짜리 꼬마(김찬재)를 비롯한 아이들 수십명도 그 배에 있었다. 뱃멀미뿐이겠는가. 화장실, 음식, 의복도 변변치 못했을 때다.   그날 배에서 내린 102명은 미주 한인 역사의 첫 페이지를 쓴 이들이다. 세월은 그들의 기록을 닳게 한다. 풍화 작용 탓에 자취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지워지고 있는 이민 선조의 비명(碑銘)을 여기저기 찾아다녔던 이유다.   배는 제물포와 호놀룰루를 64회나 더 오갔다. 1905년까지 7415명의 한인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그들은 단순히 농장 노동자가 아니었다. 선각자였다.   당시 노동자 월급은 약 16달러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다 같이 2000달러를 모았다. 300명 이상의 한 달 치 봉급과 맞먹는 액수다. 한인 선조들은 그 돈을 들고 미국 감리교단을 찾아가 학교를 세워달라고 했다. 한인기숙학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들은 멀리 내다봤다. 종일 땡볕에서 일하면서도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알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각 농장의 어린 학생을 선정, 한인기숙학교로 유학도 보냈다. 1909년 첫 졸업생(6명) 중 한 명이 주미대사를 역임했던 양유찬 박사다.   하와이카운티 헤리 김(84) 전 시장의 어머니는 김야물 여사(1984년 작고)다. 사진 신부였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 김치를 팔며 8남매를 키웠다. 김 여사뿐 아니라 한인들이 여기저기서 김치를 팔다 보니 이제는 김치 자체를 본래 하와이 것으로 알고 있는 이도 많다.   이민 선조들의 마음에는 한국과 미국이 늘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한국에 독립자금을 조달했고, 한편으로는 차세대를 주류 사회로 내보냈다. 가주 최초의 아시아계 주 의원이었던 알프레드 송도 하와이 초기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2차 대전 당시 미군으로도 참전했다.   한인 선조들의 이야기는 엄연히 이 땅의 역사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 뿌리를 알면 그래서 당당할 수 있다. 주인 의식도 가질 수 있다. 잊히는 역사를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다.   한인 이민 120주년이 저물어간다. 이민사의 초석을 다진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 오늘날 한인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선조들의 유산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 장열 기자취재 수첩 묘비 유산 이민 선조들 선정 한인기숙학교 한인 선조들

2023-12-29

“이민 선조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될 것”

“저희들의 영웅과 전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14일 오후 JJ 그랜드호텔에서 진행된 ‘영웅과 전설(Heroes and Legends)’ 책 출판기념회를 준비한 한인 청소년들은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한인 1세 영웅과 전설들을 만나자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한인 1세대 변호사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민병수 변호사를 비롯해 켄 클레인 전 USC 동아시아 도서관장, 한인가정상담소 창립 멤버인 수잔 정 소아정신과 전문의, LA 폭동 당시 한인 피해자들의 정신상담을 총괄한 조만철 정신과 전문의, 한국 전통 무용과 한복을 알린 김응화 무용가와 윤정덕 한복 디자이너, 애완견 구조활동을 벌이는 비영리재단 ‘도브(DoVe)’ 설립자 태미 조 주스만, 마라톤 코치 피터 김씨, 밸리유스오케스트라 단장 재키 구씨가 참석했다.     이들 ‘영웅과 전설’을 초청한 학생들은 올리비아 차, 다이앤 조, 조이 한, 필립 한, 셀린 홍, 김규빈, 김주원으로, 이들은 현재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0대 학생들이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착수한 프로젝트 ‘영웅과 전설’을 통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한편, 온라인 기금 모금을 통해 5000여 달러를 모아 프로젝트에 선정된 각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제작했다.     이날 자신들이 선정한 영웅과 전설을 통해 출판 행사를 가진 학생들은 “영웅과 전설 책을 만들면서 한인 커뮤니티가 성장할 수 있던 것은 1세 한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며 “이민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들이 되겠다”고 이 자리에서 다짐했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크리스토퍼 이 감독은 “우리 커뮤니티에 숨어 있는 히어로와 레전드의 업적을 차세대에 알려주고 학생들이 선조들의 길을 본받아 따라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가르칠 것”이라고 말했다. 장연화 기자이민 선조 영웅과 전설들 이민 선조들 한인 커뮤니티

2023-01-16

“120년 이민사 보존하는 역사 의식 중요” 장태한 UCR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지금까지 한인사회가 발전할 수 있던 건 희생과 고난을 감수한 이민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노력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UC리버사이드(UCR) 산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인 장태한(사진) 박사는 “초창기 이민 선조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받았고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는 말로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를 설명했다.     장 박사는 “한인들이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건 2차 세계대전 당시 김영옥 대령을 포함해 1000여명의 한인 2세들이 미군에 입대해 미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후부터”라며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주 한인사는 여전히 한인들에게는 낯선 기록이다. 장 박사가 최초로 발견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대한 역사와 기록도 오히려 주류사회에서 더 높은 관심을 두고 있다.     내년부터 뉴욕, 뉴저지, 워싱턴DC, 시카고, 샌프란시스코를 순회하는 파차파 캠프 전시회 진행을 준비할 예정이라는 장 박사는 “한인들은 여전히 경제 중심의 실용적인 교육만 중시하고 있지만,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며 “120년을 맞은 한인사회가 이제는 이민 역사를 가르치는데 좀 더 관심을 갖길 바란다”고 전했다.   장연화 기자이민사 보존 역사 의식 미주 한인사 이민 선조들

2023-01-01

[열린 광장] 이민 선조들의 ‘아리랑 드레스’

삶의 세 가지 기본 요소를 흔히들 ‘의식주’라고 부른다. ‘입는 옷(衣), 먹는 음식(食), 사는 집(住)’의 순서는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옷을 꼽는다. 마찬가지로 곤궁한 상태를 표현할 때도 ‘굶주리고 헐벗다’가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다’로 표현한다. 안 입고는 살아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을 텐데도 옷 입는 것을 중시하게 된 것은 예의와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쟁이 막 끝난 1950년대의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로 급급했다. 예쁘고 멋진 옷을 입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꼽히는 노라 노는 미국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귀국했을 때 “우리나라의 한 사람당 국민총소득이 겨우 87달러, ‘몸빼’바지가 생활복인 현실”이었다고 회상했다.     패션이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시절에 미스코리아 오현주양이 1959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아리랑 드레스’란 애칭을 얻은 양단 드레스로 의상상을 탔다. 노라 노가 디자인한 ‘아리랑 드레스’는 그 이름처럼 한복의 치마저고리 유형을 서양의 드레스와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아리랑 드레스’는 이후 해외에 나간 여성들이 즐겨 입는 옷이 되어 세계 곳곳에 한국 의상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아리랑 드레스’는 국가 등록문화재 제613호로 등재되어 한국현대의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통 복식과 서구 복식의 절충 또는 융합을 시도한 ‘아리랑 드레스’는 당시 멋쟁이들의 옷으로 유행했을 뿐 아니라 결혼식에서는 웨딩드레스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얼마 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리랑 드레스’를 직접 만났다. 순백색의 ‘아리랑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신부의 다소곳한 모습을 바라보는 신랑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 60주년을 맞아 리마인드 웨딩을 올리는 부부였다. 60여년 전,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두 사람은 교회에서 케이크와 음료수만 차려놓고 조촐한 결혼 예식을 올렸다. 유일한 사치였다면 한국에서 보내온 ‘아리랑 드레스’를 입는 것이었다.     20대의 꿈 많은 청춘이었던 신랑과 신부는 6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며 80대의 중후한 모습으로 변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미국 생활의 불확실함 속에 시작한 결혼 생활은 안정과 평안이라는 꽃을 피웠고, 자녀와 손주들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리마인드 웨딩을 주례하면서 ‘계속해서’라는 말이 맴돌았다. 60년 전 결혼식을 올리며 맺었던 약속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에 감사했다. 60년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이어온 결혼 생활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삶의 고비마다 두 사람이 함께 견뎌왔던 인내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기를 간구했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구부러진 어깨를 펴고 늠름하게 선 신랑과 60년간 깊숙이 간직했던 ‘아리랑 드레스’를 꺼내입은 신부가 두 손을 맞잡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모습에서 이민 생활이라는 거친 세파를 이긴 개선장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이민자로 사는 우리의 인생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그때 가졌던 꿈과 함께 말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 광장 아리랑 드레스 아리랑 드레스 양단 드레스 이민 선조들

2022-06-27

“이민 선조 독립운동 역사 교육”…OC코윈 ‘유스 콘퍼런스’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미서부 OC지회(이하 OC코윈, 회장 홍영옥)가 오는 20일(월) 개최하는 제9회 연례 유스 콘퍼런스를 통해 차세대에 이민 선조 독립운동 역사를 일깨운다.   OC코윈 측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년 만에 열게 된 유스 콘퍼런스의 성격에 큰 변화를 줬다.   홍영옥 회장은 “지금까진 유스 콘퍼런스에 여학생만 참가했다. 또 토론회 참가 학생 중 장학생을 뽑아 장학금을 줬다. 올해는 이민 선조들의 독립 운동 역사를 남녀 구분 없이 가르쳐 뿌리 의식을 고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홍 회장은 또 “내년 3월쯤 중가주 리들리의 독립문, 애국 지사 기념비 견학 행사를 열고 9월께 이민 독립 운동사를 주제로 여학생 대상 에세이 대회를 열어 장학생을 뽑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유스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20일 오전 10시까지 리버사이드 시의 UC리버사이드 아츠(UCR Arts, 3824 Main St) 앞에 집결해야 한다. 따로 차량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개별 출발, 귀가해야 한다.   행사는 ▶도산 안창호 동상 견학 ▶전국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와 한인들의 초기 정착 당시 모습을 소개하는 사진전 관람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의 ‘도산 안창호의 업적과 파차파 캠프’ 강연 순으로 진행된다.   윤지나 사무국장은 “참가 학생에겐 영 김 연방하원의원, 최석호·섀런 쿼크-실바 가주 하원의원 명의의 인증서를 준다”고 설명했다.   참가 대상은 OC의 7~12학년 남녀 학생이다. 16일(목)까지 이름, 학년, 이메일 주소, 전화 번호를 이메일(kowinoc2022@gmail.com)로 보내 신청하면 된다. 점심 도시락이 포함된 참가비는 1인당 10달러이며, 현장에서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의는 전화(310-739-9234)로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독립운동 콘퍼런스 이민 선조들 유스 콘퍼런스 이민 독립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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